2013년 세계 경제정세를 전망하는데서 중요한 또 하나의 화두는 바로 미국의 ‘재정절벽’위기다. ‘재정절벽(Fiscal Cliff)’위기란 미국 정부가 경제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됨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출을 급격하게 줄이고 중산층 세금까지 인상하여 만성적인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을 말한다. 사회복지분야의 지출을 줄이고 공무원 실질임금을 삭감하는 등으로 재정지출을 줄이게 되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계층은 노동자들이다. 또, 소득세 감면을 원상회복시키는 방식으로 세금을 인상하는 정책 역시 미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낮추게 된다. 노동자들이 소비여력이 줄어들면 결국 기업들도 이윤을 얻기 어려워 경제 전반이 더욱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만성적인 재정적자는 무역적자와 더불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다. 미국은 계속되는 전쟁과 고소득층 감세 정책 등으로 생기는 재정 적자를 매우기 위해 해마다 상당량의 국채를 발행해 왔다. 이는 80년대 이후 미국이 세계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수단이다. 그런데 만성적인 미국 재정 적자 문제가 왜 갑자기 세계 경제의 화두로 떠올랐을까.
국가부도 위기 넘나드는 미국 정부
미국 재정 적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증가 속도가 빨라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국가 부채는 연방정부가 월가 금융자본 등의 회생을 통한 경기부양에 적극 나서면서 해마다 1조 달러 이상 급격히 증가하여 2012년 12월, 법정 상한선인 16조 4천억 달러, 한국 돈으로 약 1경 7000조원을 넘어서고 말았다. 부채가 법정 한도를 넘는다는 것은 ‘국가 부도’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오바마는 야당인 공화당과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실질적인 ‘국가 부도’를 피하기 위해 부랴부랴 2000억 달러 정도의 부채 한도를 늘리는 긴급 조치를 취해야 했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정치협상이 난항을 겪으며 긴박하게 돌아가자, 미국 하원은 또다시 ‘국가 부도’를 피하기 위해 2013년 1월 23일 미국 연방 정부 부채의 법정 상한선을 앞으로 4개월간 한시적으로 높이는 법안을 통과시킨 상태다. 이처럼 미국 정부는 현재 국가 부도를 넘나드는 매우 위험한 재정 상태에 직면해 있다.
물론 국가 부채의 법정 한도는 정치 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인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만약 미국 의회가 법정 한도를 대폭 늘리게 되면 국가 빚이 늘어도 실질적인 부도에 처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세계 기축통화를 찍어낼 수 있는 국가인 이상, 다른 나라와는 달리 빚을 갚으려면 달러를 더 찍어내거나, 국채를 무한정 발행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빚을 내어 옛날 빚을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부채 한도 규모는 1917년 법으로 정해진 이래 79차례나 상향조정된 바 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는 금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투자 상품’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 때문에 미국은 2008년 이후 세계 경제 패권국가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달러를 찍어내며 국채도 발행하는 이른바 ‘양적 완화’로 불리는 경기부양책을 사용할 수 있었다.
1조 달러 주화 제조 논란까지 벌이는 미국
그러나 막대한 재정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시행해온 미국의 경기부양책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표 1>을 보면 미국 연방정부의 2012년 재정 상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정부는 해마다 1조 달러, 한국 돈으로 1000조원이 넘는 재정적자에 시달리며 국채를 남발하고 있다. 무려 16조 달러가 넘어버린 누적 적자를 갚기 위해 또다시 빚을 내야하는 미국 정부는 일 년에 이자만 2000억 달러(약 200조원) 이상 지불하고 있다.
이미 미국 국가 부채 총액은 2012년 9월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02.7%를 기록해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로지역(유로화 사용 17개국) 평균 95.1%보다 오히려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또 미국의 연간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GDP)대비 8.7%로 구제 금융을 받고 있는 스페인(8.5%)보다 높다. 허약한 경제에 비해 지나친 빚을 지고 있으니 갚을 능력을 의심받는 것이다.
재정 상황에 대한 위와 같은 평가에 비춰볼 때, 미국 정부의 재정지출은 앞으로 현재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워 보인다. 문제는 미국의 경제위기가 끝날 줄 모르는데 있다. 미 오바마 대통령은 정부 지출을 더욱 늘려 경기를 부양하고 금융자본, 군수자본의 이익을 보장하고 싶어도, 울며 겨자 먹기로 재정 지출을 줄일 것을 강요받는 상황으로 내몰린 셈이다.
미 대통령 오바마는 2013년 1월, 정부 재정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연 평균 600억 달러 정도의 세금을 인상하고, 동시에 최대 1200억 달러의 군사, 복지 재정지출을 줄여 연간 1800억 달러의 재정적자를 줄여가기로 공화당과 합의했다. 이 합의안에 따른 재정적자 감축액은 미국 GDP성장률을 약 1.4%나 감소시킬 수 있는 규모지만 16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재정적자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양이다. 결국 미국 정부는 자기 생존을 위해 재정 지출 규모를 더욱 줄여야만 하는 처지다.
재정 지출을 더욱 줄일 경우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세금 수입은 줄어드는데 국채 이자와 실업급여 등 나갈 돈은 더 많아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미 의회예산국(CBO)은 합의안이 발표된 직후인 1월 2일, “향후 10년간 연방정부의 세금수입이 3조 6400억 달러 감소하는 한편 재정지출은 3320억 달러 늘어나 재정적자가 (오히려) 4조 달러 늘어날 것”이라며 경고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이다.
미국 정부가 재정적자 문제로 얼마나 힘겨워 하고 있는지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바로 “1조 달러 백금주화 제조” 논란이다. 이 논란은 미국 재무부가 직권으로 무려 액면가 1조 달러, 한국 돈으로 약 1080조 원짜리 백금 동전 하나를 발행하자는 터무니없는 제안에 의해 촉발되었다. 재무부가 1조 달러짜리 동전을 신규 발행해 연방준비은행(FRB, Federal Reserve Bank. 이하 연준) 금고에 예치하면 국가부채 한도가 그만큼 깎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와 같은 제안이 현실로 되면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는 현행법 상 아무 문제없이 당분간 버틸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도 1조 달러 주화 발행에 찬동하고 나섰다. 그는 1조 달러짜리 백금 주화를 찍어내자는 청원 운동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기명 블로그에 “오바마 대통령은 1조 달러짜리 백금 주화를 찍어내야 할까?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꼼수’에 불과한 이와 같은 방안을 미국 정부가 스스로 행한다면,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이 같은 웃지 못 할 제안은 결국 실행되지 않았지만 미국 재정 적자 해결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연방정부 파산 사태를 막으려는 오바마 행정부와 공화당 사이의 협상 추이를 지켜보긴 해야겠지만, 앞으로 상당기간 미국 정부는 세금을 인상하고 재정 지출을 더욱 줄이는 방식으로 미국 노동자 서민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며 위기 탈출을 노리게 될 것이다. 물론 경기 침체는 더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균열이 가속화되는 미국 경제패권
미국 경제전망이 이처럼 암울한 가운데, 미국의 경제 패권 균열은 속도를 더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의 신뢰도에 금이 가고 있다. 이는 세계 각국의 미국 채권 보유 현황을 통해 드러난다. 미국 재무부 통계에 따르면, 2000년대 미국 채권을 가장 많이 사들이며 미국 정부의 재정을 유지해준 중국은 2012년 말 현재 보유 채권을 2011년 말에 비해 845억 달러, 2010년 말에 비해서는 4409억 달러나 줄였다. 이는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후 달러 위주의 외환보유고 구성을 피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도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을 가장 많이 구매한 주체는 바로 미국의 중앙은행격인 연준이다. 연준은 미국 정부 채권 보유량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3월 4740억 달러에서 2013년 1월 16일 현재 1조 6888억 달러로 무려 네 배 가까이 늘려 중국을 제치고 최대의 채권 구매자로 등극했다. 정부 채권을 그 나라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여 대량으로 구매한다는 것은 달러 발권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미국이 달러 발권력까지 남발하여 자기 채권을 돌려막기 하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중국이 채권 보유고를 줄이고, 미 연준이 최대의 구매자로 등극했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보증해온 이른바 ‘가장 안전한 투자 상품’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와 관련한 뉴스핌 1월 3일 보도에 의하면 미 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푸어스(S&P)와 무디스는 미 의회가 국가 부채를 축소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2014년 이전에 미국의 등급이 강등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투기자본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미국 신용평가사조차 미국 국채 신용등급을 인정해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미국 경제, 그리고 달러에 대한 신뢰 상실은 무역 결제 화폐의 다변화 바람으로 표출되고 있다. 유럽연합이 사용하고 있는 유로화가 대표적인 사례며, 중국의 위안화 사용량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2012년 10월 11일자 보도에 의하면, 중국의 위안화가 달러 대신 무역 결제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신문은 스탠다드차타드은행과 중국인민은행 자료를 인용하며, 2012년 7ㆍ8월 중국의 대외 교역에서 위안화 결제 규모는 전체 무역의 12.3%에 달한다고 보도하였다. 위안화 사용 비중이 1%에도 못 미쳤던 3년 전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다. 러시아의 푸틴 총리도 2009년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담에서 중국과의 대규모 가스 거래 시 달러 대신 자기나라 화폐인 루블과 위안화를 사용하자고 공식적으로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달러를 대신할 무역 결제 화폐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여기저기 등장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은 2010년부터 공동통화인 ‘수크레’를 무역결제에 활용하고 있다. 걸프협력이사회(GCC) 소속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등 4개국도 2009년 12월 열린 연례정상회의에서 단일통화를 만들기 위한 통화협정에 서명한 바 있다. 이들은 ‘걸프중앙은행’을 설립해 유로 같은 지역 단일 통화를 만드는 것을 최종 목표로 제시하였다.
미국이 재정 적자 문제 해결에 어려움을 겪을수록, 달러를 기반으로 한 세계경제체제의 균열 속도는 앞으로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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